앤더슨 밸리(Anderson Valley)
지구 온난화로 인해 서늘한 기후의 와인 산지가 지난 몇 년간 각광받아 왔다. 뜨거운 햇살이 내려오는 캘리포니아도 예외는 아닐 터. 산타 바바라 카운티(Santa Barbara County)의 산타 리타 힐스(Sta. Rita Hills), 소노마 카운티(Sonoma County)의 웨스트 소노마 코스트(West Sonoma Coast)나 카네로스(Carneros) 지역이 태평양의 영향으로 시원한 기후를 보이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최근 나의 눈길을 끈 지역은 멘도치노 카운티(Mendocino County)이다.

멘도치노 카운티는 캘리포니아 노스 코스트에서도 가장 북쪽에 있는 곳으로,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시원한 와인 산지로 종종 언급되는 지역이다. 이 멘도치노 카운티를 대표하는 세부 와인 산지가 바로 앤더슨 밸리(Anderson Valley). 위 지도의 연보라색이 앤더슨 밸리 AVA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곳은 멘도치노 카운티에서도 해안쪽에 자리잡은 구불구불한 언덕이며, 62개 와이너리와 90개 포도밭이 분포되어 있다.

기후가 서늘한 만큼 재배되는 품종은 피노 누아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다. 1982년엔 피노 누아의 식재율이 8%에 불과했지만, 뛰어난 피노 누아 산지임을 인정 받으며 2018년 기준으로 무려 69%에 달하게 되었다. 매년 피노 누아 페스티벌을 개최할 정도로 피노 누아에 진심인 지역인데 올해는 5월 16일부터 3일간 열린다고 한다. 피노 누아 이외에는 샤르도네가 21%로 가장 많고, 리슬링과 게뷔르츠트라미너, 피노 그리 등의 알자스 품종과 메를로도 잘 자한다. 품종적으로도 캘리포니아의 다른 AVA와는 확실히 차별화된다고 할 수 있다.
앤더슨 밸리를 대표하는 와인은 프리미엄 피노 누아와 샤르도네, 스파클링 와인을 먼저 꼽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 지역에 흥미를 느끼게 된 와인들도 다르지 않다. 그럼, 피노 누아와 스파클링 와인 두 가지를 통해 앤더슨 밸리를 좀 더 알아보도록 하자.
매기 호크 졸리 피노 누아(Maggy Hawk Jolie Pinot Noir) 2020

매기 호크(Maggy Hawk)는 시원한 앤더슨 밸리의 아름다움을 담은 와인을 생산하는 와이너리다. 캘리포니아 북부에서 자생하는 미국 삼나무(Redwood) 숲으로 둘러싸인 곳에 포도밭이 있다. 이곳에서 매기 호크는 포도의 순수함에 집중하며 그 속이 있는 자연스러운 우아함을 발견할 수 있는 와인을 만든다. 특히 매기 호크가 자리한 앤더슨 밸리의 북쪽 절반은 이 지역에선 ‘The Deep End’라 부르는데, 멘도치노 해안에서 몰려온 짙고 깊은 안개가 깔리는 언덕이기 때문이다.
매기 호크 졸리 피노 누아는 굉장히 복합적이면서도 절제미가 있는 와인이다. 잘 익은 체리와 라즈베리, 자두의 과일 아로마에 숲속을 걷는 듯한 상쾌한 솔잎과 민트, 나무 등이 복합적으로 펼쳐지는 한편, 약간의 숙성은 진행된 듯 버섯과 낙엽의 부케가 차분하게 곁들여진다. 산도는 높고 바디감은 미디엄 플러스, 좋은 밸런스를 보여준다. 타닌의 질감도 꽤 도톰하게 느껴지는 편. 천천히 테이스팅해 보면 다층적인 향이 단계적으로 변화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과하게 익은 느낌 전혀 없고 오히려 와인에서 서늘함이 느껴진다고 할까. 한 번에 모든 매력을 다 발산하는 ‘E’ 같은 피노 누아는 아니고 은근히 매력을 발산하는 ‘I’ 같은 피노 누아인데, 그래서 오는 끌림이 상당한 와인이다. 앤더슨 밸리에서 생산된 프리미엄 피노 누아를 경험하기에 아주 좋은 예시가 아닐까.
로드레 에스테이트 콰르테 브뤼(Roederer Estate Quartet Brut) NV

이름에서 예상하듯 이 와인은 샴페인 하우스 루이 로드레(Louis Roederer)와 연관이 있다. 루이 로드레가 앤더슨 밸리에 설립한 로드레 에스테이트(Roederer Estate)에서 만드는 와인. 로드레 에스테이트는 1982년부터 앤더슨 밸리의 중심에서 전통방식(Methode Traditionnelle)으로 캘리포니아산 스파클링 와인의 표본을 생산해 왔다. 캘리포니아에선 드물게 직접 소유한 포도밭의 포도만 사용한다. 샴페인으로 치면 RM이라고 해도 되겠지.
로드레 에스테이트의 스파클링 와인들은 프랑스의 양조 전통이 앤더슨 밸리의 독특한 테루아와 만난 결과물으로,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하면 소믈리에들도 샴페인으로 알 정도로 샴페인스럽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가장 기본급인 콰르테 브뤼만 마셔봤는데 확실히 캘리포니아 느낌은 적게 느껴졌다. 품종은 샤르도네 60%에 피노 누아 40%이고, 리저브 와인이 10~15%정도 블렌딩 된다고 한다. 도사주는 10g/L로 밸런스를 맞췄고 적절한 오크 사용으로 너티함을 잘 살렸다. 로드레 에스테이트의 와인 중 아무래도 콰르테 브뤼가 가격 접근성이 좋기도 하고 샵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와인이지만, 소문에 의하면 윗급인 레르미타주(L’Ermitage)가 정말 훌륭하다고 한다. 나는 레르미타주는 아직 못 만나봤지만 콰르테 브뤼는 여러 차례 테이스팅해 보고 숙성된 모습도 궁금해서 셀러링하고 있다. 고품질 캘리포니아 스파클링 와인의 표준을 만들어 내는 로드레 에스테이트의 무대가 바로 앤더슨 밸리인 것이다.